말씀일기4-생생하게 쓰기(요일1:1-4)

말씀일기4생생하게 쓰기(요일1:1-4)

  1. 참고도서 소개-“우리글 바로쓰기”(이오덕), “좋은 문장 나쁜 문장”(송준호)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생각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글에는 (살리는) 힘이 있다. 말에도 힘이 있지만, 순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글의 힘은 깊고 넓기도 하며, 또한 오래 간다.

 

글쓰기의 출발은 생각하기이다. 생각하는 힘이 글의 힘을 좌우한다.

생각하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직’이다. 정직은 그 자체로 힘을 갖는다.

생각하기의 3요소-지성, 감성, 이성

배우려는 자세, 느끼려는 자세, 결단하는 자세

상상력을 발휘하라: 문자를 깊이 들여다 보되, 문자 너머, 문자 사이를 보라.

비켜 서서 보라.

 

생각하기뿐 아니라,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원칙도 ‘정직’과 ‘자유’이다.

1) 성경을, 내 삶을 생전 처음 대면한 것처럼 마주 대하라: 낯설음 속 희열

2) 꾸며서 쓰려 하지 말고, 솔직하게 쓰라: 정직함 속 만족

3) 가능하면 짧은 문장을 구사하라: 짧은 글의 힘

4) 가능하면 ‘우리’라는 표현을 삼가고, ‘나’를 주어로 하라: 설교가 아닌 고백의 힘

5) 남의 글이나 자료를 인용해도 좋다: 공감의 힘

6) 후일에 다시 읽어보고 느낌을 기록할 수 있도록 여백을 두면 좋다: 세월의 힘

 

기록’에 대한 성서적 근거들

예레미야 36장,   다니엘 7장 1절,  요한복음 8장, 요일1:1-4

 

말씀일기 140331  렘36장  ‘기록, 낭독, 기록’

서기관 바룩의 삶은 기록하고 낭독하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받아 일러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빠짐없이 정성껏 두루마리에 기록하고(4),

기록된 말씀을 성전에서 모든 백성에게 낭독했다(10).

 

교만한 왕은 낭독되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는커녕,

두루마리를 칼로 베어 화로 불에 던져 태워버렸다(23-24).

그리고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명한다(26).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꺾이지 않는다.

말씀을 맡은 종들의 사역도 꺾이지 않는다.

그들은 불평 없이, 두려움 없이,

불살라진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다시 기록하고(28),

그 외에도 더 많은 말씀을 기록한다(32).

받아 적고, 낭독하고, 어떤 상황에도 또 다시 기록하고…

 

그렇다. ‘말씀일기’의 근본 이치가 오늘 말씀에도 있다.

‘거룩한 독서(읽기)’는 ‘거룩한 기록(쓰기)’에서부터 비롯되고,

‘거룩한 기록’은 또한 ‘거룩한 독서’로 말미암는다.

거기, ‘거룩한 나눔’이 곁들어, 풍성함이 되고 깊음이 된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주의 말씀은 더욱 분명히

새겨지고 들려지고 다시 새겨지고, 나누어져야 한다.

 

말씀일기 110924   요8장  ‘현장 일기’  

간음의 현장에서 붙들렸지만 상대 남자는 어디 가고 혼자만 잡혀 와 성전 마당에 떨며 서 있는 여인,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간악한 지도자들과 이에 휘둘리고 있는 무지한 무리들의 합작품인 돌덩이에 곧 맞아 죽게 생긴 여인, 주님은 이 여인을 무지막지한 돌팔매질 앞에서 구원해 내시고 새로운 삶을 출발하게 하신다(1-8). 그리고 당신 스스로도 율법의 돌팔매질을 피해 가신다. “그들이 돌을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9).

 

자신의 위기 속에서도 여자를 죽음의 돌팔매질에서 구해 내시고, 분위기에 휩쓸려 정죄의 돌을 들고 몰려온 무리들을 하나씩 돌아서게 하신 조용한 힘은 ‘한 마디 말씀’이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 그리고 그 말씀의 시작과 마무리는 ‘현장 일기’였다. 뭐라고 쓰셨을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땅바닥에 쓰셨다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쓰셨기에 분노의 돌을 들고 서 있는 무리들이 볼 수 있었을 것이며, 땅바닥에 손으로 쓴 것이기에 금방 지워버리면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이 행위는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분명한 선언이었으며 솔직한 자기 고백이 아니었을까?

 

죽음의 위기에 선 사람을 구원하고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었던 주님의 글쓰기, 나는 또 다시 우리의 ‘말씀일기’ 에 힘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정작 더 큰 죄악 가운데 있어 역으로 돌을 맞아야 할 무리들 한 가운데에서 주님은 조용히 글을 쓰셨다. 그들을 향해 ‘이 나쁜 놈들아, 이 사악한 무리들아’ 호통치지 않으셨다. 조용하지만 힘 있는 울림으로 손에 움켜 쥔 돌들을 내려 놓고 돌아서게 하였다. 마음 담은 글쓰기와 한 마디 말씀을 통해서.

 

고요한 글쓰기를 통해서 주님의 구원하시는 지혜와 능력을 찬양하게 되기를, 정직한 글쓰기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내 마음의 돌들을 내려 놓게 되기를 기도한다.

 

말씀일기의 한 모델

 

손교훈의 말씀일기 110728   눅18장   “만져 주심”

역시 눅18장은 ‘기도장’이다. 인내로 기다리는 기도(1-8), 참회의 기도(9-14), 삶으로 드리는 기도(18-30), 이것이 기도의 3박자이다. 그리고 그 ‘종합편’이 여리고 근처에서 맹인으로 구걸하며 살아가던 한 사람이 주위 사람들의 꾸짖음도 물리치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려 마침내 눈을 뜨고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게”(43) 되는 사건이다.

 

모든 이야기들이 ‘기도’라는 줄로 자연스럽게 엮이는 것 같은데, 그 가운데 얼핏 동떨어진 것 같은 ‘어린 아이 이야기’(15-17)가 끼어 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17b). 누가는 왜 이 대목에서 이 ‘어린 아이와 천국’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기도를 통해 임한다는 뜻 아닐까? 그리고 그 기도는 하나님께 나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에 마치 어린 아이처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1-8절 까지 등장하는 ‘과부와 재판관 비유’도 초점은 과부의 끈질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하신 자들의 모든 원한을 풀어”(3, 5, 7, 8)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있는 것이다.

 

오늘 2박3일의 일정으로 시작되는 연합 어린이 여름성경학교 개회예배에 기도 순서를 감당하고 돌아왔다. 나는 수련회 시작 전에 만난 우리 아이들 머리를 모두 쓰다듬어 주려고 애를 썼다. 그것은 15절 말씀이 마음 한 켠에 담겨 있어서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15). 어쩌면, 제자들이 일반 사람들의 마음, 즉 예수께서 자기들의 아이들을 만져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만 잘 헤아렸어도 천국을 더 잘 이해하게 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예수께서 아이들을 바라만 보고 말씀만 하시기 보다는, 만져 주시고 안아 주시기를 바랐던 것이다. 주님께서 만져 주셔야 천국인 것이다. ‘천국은 기도요, 기도는 주님의 만져주심’이다. 인내의 기도이든 겸손의 기도이든 삶의 기도이든 주님의 만져주심이 없다면, 바꿔 말해 내가 주님을 만지려 한다면 결국 하나님 나라하고는 거리가 먼 이상한 기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주님, 내 영혼을 어루만져 주소서. 내 안의 얄팍함을 내려 놓게 하소서. 나를 끌고 다니는 교만을 내려 놓게 하소서. 내게 붙어 있는 소유를 내려 놓게 하소서. 어린아이처럼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나를 만져 주소서.

 

** 세계 최고의 작가들이 말하는, 글 잘 쓰는 법                                       

 

** 카지노에 없는 것: 거울, 시계, 창문                               과제: 눅12, 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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