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고아 여인은 역시 슬기로웠다. 물론 그녀는, 다윗의 속내를 읽고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려는 요압의 간교한 명령에 따라, 다윗 왕 앞에 나왔다. 그리고, 요압이 미리 꾸며 준 각본에 따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겐 단순한 꼭두각시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녀는 충분히 다윗을 설득하고 있다. 지혜롭기도 하고 담대하기도 하다.
그 무엇보다도 나는 무심결에 그녀가 쏟아 놓는 신앙고백적 선언에 눈이 간다. 다윗을 설득하는 클라이맥스 단계에서 그녀가 하는 말은 특히 7절과 14절이 대조되면서 가히 ‘복음’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겠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땅에 쏟으면, 다시 담을 수 없는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방책을 베푸셔서 비록 내어 쫓긴 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삼하14:14, 새번역).
어두움이 드리워진 권력 한 복판에 한 줄기 빛이 비추는 듯 하다. 찢기고 뜯긴 상처에 다시 새 살이 돋을 것 같다. 긴 겨울은 마침내 끝나고 새 봄이 올 것만 같다. 그렇게 복음은 생명이고 희망이다. 다윗 왕가의 칙칙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권력의 명에 따라 목숨 건 연기를 해야만 했던 힘 없는 여인을 통해 복음은 더욱 생생하게 메아리 친다.
이사야 말씀도 떠오른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고……”(사42:1-3). 인간은 끊으려 하고 씨를 말리려 하지만(7), 하나님은 이어주려 하시고 남겨두려 하신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 주시면서 까지도.
여전히 어두운 오늘날 희망의 복음, 사랑의 복음이 더욱 필요하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드고아 여인’이 절실하다. 그렇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고, 의도하든 안 하든 결국 무언가를 전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대책은 마련해 놓아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3:15-16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