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만 장로 : 30주년 기념 행사-찬양제 및 루터 종교개혁지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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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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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셀도르프 선교교회 창립 30주년 기념 찬양제를 마치고

    – 신형만 (뒤셀도르프 선교교회 장로)

    10월 26일 토요일 오후, 뒤셀도르프 Kaiserswerther에 소재한 Mutterhauskirche에서 뒤셀도르프 선교교회 창립30주년 기념 찬양제가 열렸다.

    찬양제의 시작을 알리는 깊고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곡(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 크고 아름답게 교회의 홀을 가득 채워 나가자, 나를 비롯한 찬양제에 참석한 청중들은 이내 잠잠해지며 찬양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뒤셀도르프 선교교회 찬양대가 파이프 오르간의 반주에 맞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나갔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솔로 연주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나갔다. 또한 단연 돋보였던 2중창, 혼성4중창, 그리고 남성4중창의 프로그램은 한국어뿐 아니라 독일어와 영어 등 외국어로 짜여진 곡들로 구성되어 있어 독일 청중들도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Nemorino und Dulcamara aus Liebes Krank’라는 오페라 중 한 대목을 유쾌한 해설과 함께 할 수 있었고, 루터의 ‘The Lord bless you and you’와 같은 찬양들을 아카펠라로 정했으며 ‘남촌’이라는 곡은 이 독일 땅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다시금 한국의 옛날을 연상케 했다.

    끝으로 다시 힘차게 무대에 오른 찬양대는 ‘주의 기도’와 ‘승전가’라는 곡을 통해 모든 프로그램이 끝났지만 잦아들지 않는 청중들의 박수로 두 번 앵콜을 들려주었던 뒤셀도르프 선교교회 찬양대와 지휘자 및 연주자들에게 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마음의 박수를 보낸다.

    이메일을 통해서까지 연습을 시키신 지휘자 황유순 집사님의 열정과 담임목사님 이하, 모든 교우들의 중보와 격려 등, 전교인의 정성이 모아졌던 찬양제에서 또 다시 느끼는 것은 계획과 준비는 우리가 하지만, 우리의 상상보다 더 크게 이루어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찬양제였다. 30년 동안 한결 같이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이끌어주시고 지켜주신 주님께 진심 어린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성지 순례: “마틴 루터를 쓰신 하나님”

    – 한상철(뒤셀도르프 선교교회 장로)

    뒤셀도르프 선교교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종교개혁의 선봉장 마틴 루터의 신앙의 족적을 더듬어 보는 성지순례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출발했다. 뒤셀도르프 교회 앞에서 시작된 일정은 카셀을 경유하여 아이제나흐와 인근의 바르테부르크 성 방문으로 이어진다.

    비텐베르크에서 1박 후, 다음날 시내에 있는 루터의 사역의 흔적을 찿아보고 아이스레벤, 만스펠트를 거쳐 다시 뒤셀도르프로 돌아오는 상당히 빡빡하고 피곤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예정대로 10월21일 오전 8시에 최신 관광버스에 몸을 실은 우리들은 조금은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귀한 여행이 되길 기도하며 출발했다.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전체적인 일정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마틴 루터를 사용하여 당신의 일을 계획대로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후 3시경 아이제나흐 의 바르테부르크 성에 도착했다. 해발 400미터의 성위에서 내려다보는 산아래 가을 단풍의 장관을 감상하며 자연의 신비와 장엄함에 탄성을 발한다.

    이곳 바르테부르크 성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호의로 루터가 10개월 동안 은둔하며 헬라어의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곳이다.

    성의 규모는 전체적으로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이 성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으며 천년의 역사에 얽힌 중요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고 수많은 유명인물과 사연을 가진 성이다.

    건물 곳곳 마다 마틴 루터와 관련된 설명을 듣는 교우들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 보였다. 특히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다는 작은 방에서는 5세기 전, 이 방에서 하나님의 일에 심혈을 기울렸던 믿음의 선배의 모습을 감동에 찬 마음으로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일정상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인근에 있는 아니제나흐로 향한다.

    이곳에는 루터의 외갓집이 있었고 3년간 청소년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다. 여기에 있는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루터는 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불렀고 1685년 바하가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또 개혁자 루터가 보름스의회를 가던 1521년 4월10일과 돌아오던 길에 5월3일, 두번 설교를 한 곳으로 유명하다.

    교회 입구에는 ‘내 주는 강한성이요’라는 루터의 자작 찬송가이며 종교개혁의 노래 구절이 적혀 있다.

    루터하우스 옆의 거리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작은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구절과 루터의 문장과 이름이 적혀있다. 대부분 이 말을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말이라고 알고 있지만 스피노자가 루터보다 후대의 사람인 것으로 미루어 이 명언의 원조는 루터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제 이날의 마지막 목적지인 비텐베르크로 향한다. 저녁9시가 다 되어서 예약된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삼삼오오 어둠이 짙게 깔린 시내 구경을 나간다.

    22일 새벽 동이 트기 전. 미명에 이곳 저곳 목적도 없이 새벽길을 거닐다가 우연히, 큰 나무 아래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앉아서 루터의 일생과 그의 신앙에 대한 목사님 설명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루터는 1483년 출생해서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505년 부친의 요청으로 법과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경험한 후 법학공부를 그만두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1507년 신부로 임명을 받은 후, 1512년에는 신학박사가 되고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부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그즈음 로마에서는 교회의 재정난과 베드로 성당의 개축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 판매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많은 비리와 성경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변질된 믿음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1517년 10월31일 95개 조항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 앞에 붙이게 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다. 원래 이 논제를 내건 목적은 신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잘못된 종교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해 보자는 것이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외치며 전력 질주했던 루터의 삶을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것으로 루터 본인조차도 상상도 못했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의 하나인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일을 하나님은 이루신 것이다.

    내가 앉아 묵상한 참나무 아래에서 루터는 1520년12월10일 교황이 보낸 파문장과 교회 법령집을 학생과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그 다음 해 보름스 의회에서 황제와 그의 추종자들이 함께한 절대권력 앞에서도 성서적 논증과 명확한 추론에 의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절대자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믿음인 것이다.

    아침 식사 후, 이번 순례여행의 가장 중심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비텐베르크 시가지 곳곳을 박식하신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본다. 구시가지는 과거를 보여주는 석조건물들이 마치 진주처럼 줄줄이 이어져 있으며 도시 동쪽에서 부터 루터하우스, 반박문이 붙었던 그 유명한 성교회의 문, 루터와 멜랑히톤의 무덤, 가는 길에 멜랑히톤 하우스, 화가 크라나하가 그린 제단화로 유명한 시립교회와 그의 저택들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루터의 제자이며 친구였던 멜랑히톤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바울이 바울되는데 없어서는 안 되었던 바나바를 생각해 보았다. 루터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루터의 의중을 정확히 대변하고 말없이 루터의 그늘에서 만족했던 멜랑히톤 역시 범상치 않은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배우게 되었다.

    비텐베르크를 뒤로하고 아이스레벤으로 향했다. 아이스레벤은 루터의 출생지이기도 하고 루터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루터는 이곳에서 불과 몇 개월 정도 살았지만 지금은 루터 거리로 이름이 바뀐 이 곳에 3층의 건물이 서 있다. 생가 뒷 뜰에 세워진 전시관은 통독 후 대대적인 복원사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전시관 왼쪽에는 루터의 빈민 아동학교 기념관이 있다.

    루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대로 종교개혁에 자신을 바치기도 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교육개혁에 남달리 힘써 온 뛰어난 교육가임을 이번 여행으로 배우게 되었다.

    또한 아이스레벤의 성안드레아스 교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교회는 루터가 생애 최후 4편의 설교를 한 곳으로 마지막 설교는 1546년 2월14일 마태복음 11장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다가 “이 복음에 대해 좀 더 말하고 싶지만, 너무 힘들어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라며 중간에 내려온 루터의 설교단이 보존 되어 있다.

    출발할 때 이미 예측했지만 1박2일의 일정으로는 루터의 도시들을 다 섭렵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루터가 대학시절을 보낸 에르푸르트는 안타깝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대신에 아이스레벤에서 가깝고 루터의 아버지가 광산을 경영하여 성공한 만스펠트를 둘러보았다. 정감어린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작은 광장을 소유하고 있는 매력적인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루터는 14살까지 살았으며 그의 이름을 딴 루터하우스, 루터학교가 있으며 그가 미사를 돕는 아동 봉사자(복사)로 섬기고 성가 대원으로 봉사한 성게오르규 교회, 그리고 루터분수와 기념탑이 있다.

    루터의 신앙의 흔적들을 둘러보던 중, 문듯 이 모든 것이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루터의 믿음을 받으신 주님은 그것으로 종교가 개혁되는 영적인 불길이 활화산 같이 타오르게 하셨고 마틴 루터 한 사람의 삶을 받으신 주님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루터의 이름 하나로 대를 이어 육적인 필요를 해결하는 기적을 허락하셨다.

    ‘나’라는 보잘 것 없는 인생도 은혜로 주신 믿음 안에서 나의 나됨이 은혜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정직한 관계를 십자가를 통해 지키려고 몸부림을 칠 때, 누가 알겠는가! 또 따른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실런지…

    그리고 기도한다, 짧지 않은 지난 30년의 세월, 모든 아픔과 기쁨의 현장에 함께 하신 주님이 앞으로 맞을 30년도 동행하시고 역사하시어 선교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만이 되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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