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다니엘 집사의 말씀일기-다른 복음(갈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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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교훈
    키 마스터

    다른복음(갈1:1-10) by 김 다니엘

    갈라디아서의 서두에 바울은 강력하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어필을 한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두 번씩이나 반복할 정도로 강하게 말씀을 하신다. 저주란 단어는 성경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라는 뜻으로 거의 쓰인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던 거 같다. 유대교 출신의 교사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즉, 율법도 지키면 더 좋지 않은가 혹은 율법도 지켜야 한다 라고 가르쳤다. 사실 율법을 지킬 수 있다 혹은 지켜야 한다 라고 하는 율법주의는 복음과는 전혀 다르고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잘 안다. 바울은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표현했고 그 말씀은 율법주의는 전혀 신앙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성경을 읽을 때 난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를 자주 반추해 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어떤 변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는데 딱히 그다지 외형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있다면 나이가 더 먹었다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면서 다짐했던 것 중에 하나가 좀 더 착해지고, 좀 더 선해지고, 좀 더 나쁜 짓 안하고, 좀 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등, 좋은 행동들을 더 많이 하려고 했던 것들이 생각이 난다. 교회에서 그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때가 묻고 더 나빠지고 더 악해지고, 더 나쁜 짓들을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가 결국은 적당히 내 내면에게 에이, 세상 살면 다 그런 거지 뭐 하면서 타협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긋나 버리고, 교회의 출석은 종교적 행위로써 그쳐버리고 말았다. 가끔 하기는 싫지만 그냥 좀 손가락질 받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서 봉사나 하고, 또 그런 봉사가 하나님께서 마치 나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으실 거란 생각도 해 가면서, 거기다가 더해서 하나님께 요구도 하면서 안 들어 주시면 원망도 하고 수 많은 이유를 갖다 붙이기도 했었다.

    나의 내면은 그렇게 더 많이 망가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겠지만, 나 자신은 모순 덩어리였고 위선투성이였다. 그런데 나의 내면이 점점 더 망가져 가는 게 아니라 원래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망가져 있었다 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늘 이 말씀에서 왜 이런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을까를 생각해 봤다. 지난 날 교회에서 가르쳐 주었던 수 많은 교훈적인 것이 오버랩 되어 온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독교에서 표현되는 소위 율법주의자로 교육된다. 그 위에 덧붙여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면 오히려 그 율법이 더 강화가 되어서 더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게 되지 않나 싶다. 나에게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참으로 자유로운 게 아니라 나를 더욱 옥죄었었다.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더욱 더 죄에 묶어서 나를 가두었었다. 그러다 보니 삶의 양식도, 태도도 행동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위선적이 되어 가고 가식적이고, 내 스스로가 그것이 위선이다 라고 느낄 때 하나님 하고의 관계에서보다는 내 양심과 갈등을 했다. 그럴 때 인간은 적당히 위선적이라는 말에 나에 대한 위안도 삼아 보고, 행동양식이 나와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하고, 나와 비슷하지 않으면 용납도 하지 못했으니 용서라는 단어는 나와 거리가 한참 멀어서 진정으로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하지 못했었다. 나 자신에 대한 용서도 안 됐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분노만 더해갔다. 그런 것들이 나의 모습이었다. 물론 아직도 다 해결 되었다고 보긴 힘들다.

    예수를 믿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 라는 어쩌면 참 좋아 보일 듯도 하고 더 그럴 듯 해 보이는 이 다른 복음은 나를 그렇게 율법주의라는 죽음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옭아매 놓았었다. 나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랬던 나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건져내 주셨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 겉 모습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나의 내면의 모습은 오늘도 이 순간에도 내가 치러야만 했던 것을 대신해서 다 치러주신, 내가 내 스스로 치르려고 했다면 그냥 끝나 버려서 죽어 버려야 했던 그런 상태였던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인간이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그 대가를 치를 수 없으심을 알고 직접 생명을 내 놓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복음, 너무나도 값이 비싸서 내가 도저히 치를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직접 치르시고 그냥 내 손에 주셔버린 그 은혜, 오늘도 난 하나님의 그 은혜의 바다 속에 깊이 빠져 있음을 감사 드리고 또 감사 드린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렇게 달라져 있었다. 복음은 나를 이렇게 변화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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